바실리 바르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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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실리 바르톨트는 186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중앙아시아, 튀르키스탄,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연구하여 유라시아 내륙의 중요성을 강조한 역사학자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를 전공했으며, 1900년 몽골 침입 시대의 투르키스탄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3년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1918년부터 1921년까지 표트르 대제 박물관장을 역임했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문자를 키릴 문자로 개량하는 데 기여했으며, 400편 이상의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바르톨트는 1930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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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바르톨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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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바르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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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역사학자 |
국적 | 러시아 |
출생 | 1869년 11월 15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사망 | 1930년 8월 19일 |
사망지 | 소련 레닌그라드 |
학력 | |
모교 |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
경력 | |
직장 |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교수 |
학문 분야 | |
연구 분야 | 동양학 언어학 역사학 |
지도 교수 | 알렉산드르 베셀롭스키 |
주요 업적 | 소비에트 동양학의 확립 |
주요 저서 | 《몽골 침공기의 투르키스탄》 《투르키스탄 문화사》 |
소속 학회 |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
2. 생애
1869년 바르톨트는 부유한 독일계 주식 거래자의 자식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1] 그의 세례명은 빌헬름이며, 서양에서는 빌헬름 바르톨트라고도 불린다. 188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의 동양 언어학과에 입학해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를 전공하고 알렉산드르 베셀로프스키와 로젠 밑에서 중앙아시아사 및 이슬람 중세사를 배웠다. 1891년 대학을 졸업해 유럽 유학을 떠났다.[1]
1896년 그는 귀국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비상근 강사가 되었다. 이 당시 그의 강의는 그의 무슬림 국가들에 대한 여행 일정이 언제나 예정보다 길어졌기 때문에 항상 늦어졌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그의 논문 『몽골 침입 시대의 투르키스탄』(''Turkestan down to the Mongol Invasion'', 1898–1900)에서 그는 몽골의 지배가 무슬림 세계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고 주장했다. 바르톨트는 이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아랍 역사학자들의 키예프 루스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출판했다. 또한 그는 무슬림 연구에 대한 여러 학술지를 편집했으며, 『이슬람 백과사전』(''Encyclopaedia of Islam'') 초판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1913년 그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1917년 2월에 그는 러시아 국경지대 인구의 부족 구성학 위원회원이 되었다.[1]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 바르톨트는 표트르 대제 박물관장으로 임명되어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그의 이슬람 역사에 대한 논문들 중 3편인 ''Islam'' (1918), ''Muslim Culture'' (1918, 이 논문은 샤히드 수라와디가 영어로 번역했다.), ''The Muslim World'' (1922) 은 대단히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 또한 그는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들이 키릴 문자를 채택했을때, 이를 다듬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영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로 번역이 되었다. 바르톨트의 작업물들은 수집되어 1963년에서 1977년 사이에 9권으로 출판되었다.[1]
바르톨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화된 독일인 가문에서 태어났다.[1] 그의 경력은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몇 년과 소련의 초기 몇 년에 걸쳐 있었다.
1899년, 스탠리 레인 풀의 저서 "무슬림 왕조"가 바르톨트의 번역으로 출판되었으며, 번역자가 많은 수정을 거쳤다.[2]
1900년, "몽골 침략 시대의 투르키스탄"(1부 및 2부, 상트페테르부르크, 1898-1900) 논문을 방어한 후, 바르톨트는 동양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1901년 V. 바르톨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의 특별 교수, 1906년에는 정교수로 임명되었다.[2]
그는 1903년에 설립된 중앙 및 동아시아 탐사를 위한 러시아 위원회의 비서였다.
1904년 그는 사마르칸트 인근에서 고고학 발굴을 했고, 1910년에는 과학 아카데미의 통신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13년에는 "아시아 민족의 문학과 역사" 분야의 정규 학술원으로 선출되었다.[3]
1912년 저서 "칼리프와 술탄"에서 바르톨트는 다음과 같은 과학적 발견을 했다. 즉, 16세기에 마지막 아바스 왕조 칼리프 알-무타와킬 3세의 정신적 권력이 오스만 술탄 셀림 야부즈에게 이전되었다는 생각은 18세기보다 더 이전에 나타난 전설임을 증명했다.[3]
1913년 5월 바르톨트는 남부 우랄, 시베리아, 중앙 아시아로 학술 여행을 떠나 오렌부르크, 우파, 그리고 우파 주, 스터르리타마크 지역, 스텔리바셰보 마을을 방문했다. 1917년 2월 바르톨트는 러시아 및 인접 국가 인구의 부족 구성을 탐사하기 위한 학술 위원회에 합류했다(위원장: 학술원 세르게이 올덴부르크).[3]
10월 사회주의 혁명 이후, 바르톨트는 1921년 아시아 박물관에 설립된 동양학자 대학을 이끌었다. 그가 소비에트 권력의 첫 해 동안 관여한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의 문자가 없는 민족을 위한 문자를 만들고 아랍 문자를 키릴 문자로 대체하는 것이었다.[4]
바르톨트는 바쿠에서 열린 제1차 전연방 투르크학 회의 (1926)의 참가자이자 조직자 중 한 명이었다.[4]
1924-1926년 그는 바쿠를 방문하여 레닌그라드와 카잔 대학교의 교수들에 의해 바쿠 국립 대학교에 동양 학부를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이 대학교의 학생들을 위해 "아제르바이잔의 역사", "무슬림 세계 역사에서 카스피해 지역의 위치"라는 강의를 진행했는데, 여기서 그는 바쿠를 포함한 아제르바이잔의 몇몇 도시의 역사적 중요성을 분석했다.[4]
바쿠에서 그는 과학자, 교사, 지방 행정가들을 만나 박물관, 모스크, 샤 궁전, 요새 및 묘지를 방문했다. 바쿠에서의 그의 활동 외에도 그는 니자미 간자비, 페르도우시, 코르쿠트의 영묘를 보존하고 오구즈 서사시 " 코르쿠트 아타의 책"을 번역하는 데 참여했다.[4]
그는 아제르바이잔 대학교 도서관 및 사비르 도서관의 소장품에서 몇몇 원고를 접하고 번역했다. 그는 바쿠 교육회관에서 열린 아제르바이잔 조사 및 탐사 학회의 역사 및 민족지학 분과 회의와 바쿠에서 열린 제1차 전연방 투르크학 회의 (1926)에서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가 바쿠시에 대해 수집한 정보는 그의 "이슬람 백과사전"의 "바쿠" 항목에 포함되어 있다.[4]
그는 전 세계 여러 도서관(영국, 독일, 프랑스, 터키 등), 소련(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타슈켄트, 바쿠 등)을 방문했다. 그의 해외 및 소련 전역 여행의 주요 목적은 동양 필사본 컬렉션을 탐사하는 것이었다. 도서관에 대한 그의 뛰어난 지식은 그가 페트로그라드 고고학 연구소의 보관 과정 학생들을 위해 기록 보관 작업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1918), 도서관의 상태와 그들의 필사본 부서에 대한 기사를 쓰고 검토하고, 자료 수집, 카탈로그를 통한 공개 등에 대한 제안을 할 수 있게 했다.[4]
1927년 1월 그는 니콜라이 마르의 초청으로 레닌그라드 공공 도서관의 동양 부서의 작품에 대한 컨설턴트로 과학 크레딧으로 급여를 받고, 1928년 2월 1일부터 비정규직 직원으로 등록되었다.[4]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바르톨트의 강의는 이슬람 국가로의 장기간의 현장 답사로 매년 중단되었다. 그의 논문 2권(''몽골 침략까지의 투르키스탄'', 1898-1900)에서 그는 몽골 통치가 초기 정복 이후 무슬림 세계에 가져다준 많은 이점을 지적했다. 바르톨트는 초기 아랍 역사가들이 키예프 루스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최초로 출판했다. 그는 또한 여러 학술 저널의 무슬림 연구를 편집했으며, ''이슬람 백과사전''의 초판에 광범위하게 기여했다. 1913년, 그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17년 2월 그는 러시아 변경 지역 인구의 부족 구성을 연구하는 위원회에 임명되었다.[4]
러시아 혁명 이후, 바르톨트는 표트르 대제 인류학 및 민족지학 박물관의 관장으로 임명되어 1918년부터 1921년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그는 이슬람의 역사에 대한 세 권의 권위 있는 모노그래프, 즉 ''이슬람'' (1918), ''무슬림 문화'' (1918) 및 ''무슬림 세계'' (1922)를 저술했다. 그는 또한 소비에트 중앙 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를 위한 키릴 문자의 발전에 기여했다.[4]
그의 저작 대부분은 영어, 아랍어 및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었다. 바르톨트의 수집된 작품은 1963년에서 1977년 사이에 9권으로 재판되었으며, 소련 편집자들이 그의 '부르주아'적 태도를 비난하는 각주를 추가했지만, 그의 명성은 텍스트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에 부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검열되지 않은 채로 남겨둘 정도였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최근 모스크바에서 재판되었다.[4]
그의 아내는 동양학자 발렌틴 주콥스키의 여동생인 마리아 주콥스카야(1868-1928)였다.[5]
1869년, 부유한 독일계 주식 중개인의 아들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빌헬름이며, 서양에서는 빌헬름 바르톨트라고도 불린다.
어릴 적부터 역사에 강한 관심을 보여 김나지움 재학 중이던 1886년에 몽골사 개요를 썼다고 한다. 이듬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동양어학과에 입학하여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를 전공하고, 알렉산드르 베셀로프스키와 로젠 밑에서 중앙아시아사 및 이슬람 중세사를 배웠다. 재학 중에 처녀 논문 '중앙아시아의 기독교'를 저술하여 은메달을 수상했다. 또한, 아카데미 회원인 바실리 라드로프의 지우를 얻어 당시 일류 동양학자들과 교류했다.[6]
1891년 대학교를 졸업하자 로젠의 권유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1896년 귀국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비상근 강사가 되었다. 1900년에 저술된 학위 청구 논문 '몽골 침공기의 투르키스탄'은 1차 사료와 현지 조사의 성과를 활용하여 7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의 중앙아시아사 전체를 논한 것으로,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 현재도 이 분야의 고전적인 논고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원래 학사 학위를 받기 위해 쓰였지만, 대학교는 논문의 내용이 훌륭함을 인정하여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객원 교수가 되었고, 1906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1913년에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이후 동양학자 협의회 상임 의장으로 선출되었다.[6]
러시아 혁명 후에도 대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 한편, 세계 각국을 방문하여 현지 조사와 강연을 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가 아니었고, 소련의 민족 정책에도 비판적이었지만, 엄밀한 사료 비판에 기반한 실증적인 문헌 사학을 통해 소비에트 동양학의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20년대 말부터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끈질긴 공격을 받았지만[6], 대숙청이 시작되기 전인 1930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했다.[6]
그러나 그 후 바르톨리드 학파의 제자들은 '부르주아적'으로 숙청의 희생이 되기도 했다[6].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69년 바실리 바르톨트는 부유한 독일계 주식 거래자의 아들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빌헬름이며, 서양에서는 빌헬름 바르톨트라고도 불린다.[1] 188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동양 언어학과에 입학해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를 전공하고, 알렉산드르 베셀로프스키와 로젠 밑에서 중앙아시아사 및 이슬람 중세사를 배웠다.[6] 재학 중에 처녀 논문 '중앙아시아의 기독교'를 저술하여 은메달을 수상했다.[6] 또한, 아카데미 회원인 바실리 라드로프의 지우를 얻어 당시 일류 동양학자들과 교류했다.[6] 1891년 대학을 졸업해 유럽 유학을 떠났다.[6]1896년 귀국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비상근 강사가 되었다.[6] 1900년에는 학위 청구 논문 '몽골 침공기의 투르키스탄'을 저술했는데, 이는 1차 사료와 현지 조사의 성과를 활용하여 7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의 중앙아시아사 전체를 논한 것으로,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 현재도 이 분야의 고전적인 논고로 평가받고 있다. 이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객원 교수가 되었고, 1906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6] 이 논문에서 그는 몽골의 지배가 무슬림 세계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고 주장했다. 바르톨트는 이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아랍 역사학자들의 키예프 루스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출판했다. 1913년 그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6]
그의 강의는 무슬림 국가들에 대한 여행 일정이 언제나 예정보다 길어졌기 때문에 항상 늦어졌다. 1913년 5월 바르톨트는 남부 우랄, 시베리아, 중앙 아시아로 학술 여행을 떠나 오렌부르크, 우파, 그리고 우파 주, 스터르리타마크 지역, 스텔리바셰보 마을을 방문했다.[3] 1917년 2월에 그는 러시아 국경지대 인구의 부족 구성학 위원회원이 되었다.[3]
2. 2. 학문적 경력
바실리 바르톨트는 186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부유한 독일계 주식 거래자의 아들로 태어났다.[1]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양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를 전공하고 중앙아시아사와 중세 이슬람사를 배웠다.[1] 1891년 대학 졸업 후 유럽 유학을 떠났다가 1896년 귀국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비상근 강사가 되었다.[1]1900년, "몽골 침략 시대의 투르키스탄"(1부 및 2부) 논문을 통해 동양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이 논문에서 그는 몽골의 지배가 무슬림 세계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고 주장했다.[1]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특별 교수, 1906년에는 정교수로 임명되었다.[2] 그는 이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아랍 역사학자들의 키예프 루스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출판했다.[1]
1913년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3] 1917년 2월에는 러시아 국경지대 인구의 부족 구성학 위원회원이 되었다.[1] 1912년 저서 "칼리프와 술탄"에서 바르톨트는 16세기에 마지막 아바스 왕조 칼리프 알-무타와킬 3세의 정신적 권력이 오스만 술탄 셀림 야부즈에게 이전되었다는 생각은 18세기보다 더 이전에 나타난 전설임을 증명했다.[3]
볼셰비키 혁명 이후, 1918년부터 1921년까지 표트르 대제 박물관장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Islam'' (1918), ''Muslim Culture'' (1918), ''The Muslim World'' (1922) 등 이슬람 역사에 대한 권위있는 논문들을 저술했다.[1] 또한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들이 키릴 문자를 채택했을 때 이를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다.[1]
바르톨트는 바쿠에서 열린 제1차 전연방 투르크학 회의 (1926)의 참가자이자 조직자 중 한 명이었다.[4] 1924-1926년 그는 바쿠를 방문하여 레닌그라드와 카잔 대학교의 교수들에 의해 바쿠 국립 대학교에 동양 학부를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 그는 니자미 간자비, 페르도우시, 코르쿠트의 영묘를 보존하고 오구즈 서사시 " 코르쿠트 아타의 책"을 번역하는 데 참여했다.[4]
그의 작업물들은 수집되어 1963년에서 1977년 사이에 9권으로 출판되었다.[1]
2. 3.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바르톨트는 표트르 대제 박물관장으로 임명되어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1] 그는 이슬람 역사에 대한 세 편의 논문, ''Islam'' (1918), ''Muslim Culture'' (1918), ''The Muslim World'' (1922)를 저술했는데, 이들은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1] 또한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들이 키릴 문자를 채택했을 때 이를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다.[1]바르톨트는 소련 권력의 첫 해 동안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의 문자가 없는 민족을 위한 문자를 만들고 아랍 문자를 키릴 문자로 대체하는 중요한 임무에 관여했다.[4] 그는 바쿠에서 열린 제1차 전연방 투르크학 회의 (1926)의 참가자이자 조직자 중 한 명이었다.[4] 1924-1926년 그는 바쿠를 방문하여 레닌그라드와 카잔 대학교의 교수들에 의해 바쿠 국립 대학교에 동양 학부를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 그는 이 대학교의 학생들을 위해 "아제르바이잔의 역사", "무슬림 세계 역사에서 카스피해 지역의 위치"라는 강의를 진행했는데, 여기서 그는 바쿠를 포함한 아제르바이잔의 몇몇 도시의 역사적 중요성을 분석했다.[4]
바쿠에서 그는 과학자, 교사, 지방 행정가들을 만나 박물관, 모스크, 샤 궁전, 요새 및 묘지를 방문했다.[4] 바쿠에서의 그의 활동 외에도 그는 니자미 간자비, 페르도우시, 코르쿠트의 영묘를 보존하고 오구즈 서사시 " 코르쿠트 아타의 책"을 번역하는 데 참여했다.[4] 그는 아제르바이잔 대학교 도서관 및 사비르 도서관의 소장품에서 몇몇 원고를 접하고 번역했다.[4] 그는 바쿠 교육회관에서 열린 아제르바이잔 조사 및 탐사 학회의 역사 및 민족지학 분과 회의와 바쿠에서 열린 제1차 전연방 투르크학 회의 (1926)에서 보고서를 발표했다.[4] 그가 바쿠시에 대해 수집한 정보는 그의 "이슬람 백과사전"의 "바쿠" 항목에 포함되어 있다.[4]
그는 전 세계 여러 도서관(영국, 독일, 프랑스, 터키 등), 소련(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타슈켄트, 바쿠 등)을 방문했다.[4] 그의 해외 및 소련 전역 여행의 주요 목적은 동양 필사본 컬렉션을 탐사하는 것이었다.[4] 도서관에 대한 그의 뛰어난 지식은 그가 페트로그라드 고고학 연구소의 보관 과정 학생들을 위해 기록 보관 작업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1918), 도서관의 상태와 그들의 필사본 부서에 대한 기사를 쓰고 검토하고, 자료 수집, 카탈로그를 통한 공개 등에 대한 제안을 할 수 있게 했다.[4] 1927년 1월 그는 니콜라이 마르의 초청으로 레닌그라드 공공 도서관의 동양 부서의 작품에 대한 컨설턴트로 과학 크레딧으로 급여를 받고, 1928년 2월 1일부터 비정규직 직원으로 등록되었다.[4]
그의 저작 대부분은 영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었다.[1] 바르톨트의 수집된 작품은 1963년에서 1977년 사이에 9권으로 재판되었으며, 소련 편집자들이 그의 '부르주아'적 태도를 비난하는 각주를 추가했지만, 그의 명성은 텍스트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에 부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검열되지 않은 채로 남겨둘 정도였다.[4]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최근 모스크바에서 재판되었다.[4]
러시아 혁명 후에도 대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 한편, 세계 각국을 방문하여 현지 조사와 강연을 했다.[6]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가 아니었고, 소련의 민족 정책에도 비판적이었지만, 엄밀한 사료 비판에 기반한 실증적인 문헌 사학을 통해 소비에트 동양학의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6] 1920년대 말부터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끈질긴 공격을 받았지만[6], 대숙청이 시작되기 전인 1930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했다.[6]
2. 4. 말년
바실리 바르톨트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표트르 대제 박물관장으로 임명되어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1] 그의 이슬람 역사에 대한 논문들 중 3편인 ''Islam'' (1918), ''Muslim Culture'' (1918), ''The Muslim World'' (1922) 은 대단히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1] 또한 그는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들이 키릴 문자를 채택했을때, 이를 다듬는데도 도움을 주었다.[1]바르톨트는 1921년 아시아 박물관에 설립된 동양학자 대학을 이끌었다.[4] 소비에트 권력의 첫 해 동안 바르톨트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의 문자가 없는 민족을 위한 문자를 만들고 아랍 문자를 키릴 문자로 대체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4]
그는 바쿠에서 열린 제1차 전연방 투르크학 회의 (1926)의 참가자이자 조직자 중 한 명이었다.[4] 1924-1926년 그는 바쿠를 방문하여 레닌그라드와 카잔 대학교의 교수들에 의해 바쿠 국립 대학교에 동양 학부를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 그는 이 대학교의 학생들을 위해 "아제르바이잔의 역사", "무슬림 세계 역사에서 카스피해 지역의 위치"라는 강의를 진행했는데, 여기서 그는 바쿠를 포함한 아제르바이잔의 몇몇 도시의 역사적 중요성을 분석했다.[4]
바쿠에서 그는 과학자, 교사, 지방 행정가들을 만나 박물관, 모스크, 샤 궁전, 요새 및 묘지를 방문했다.[4] 바쿠에서의 그의 활동 외에도 그는 니자미 간자비, 페르도우시, 코르쿠트의 영묘를 보존하고 오구즈 서사시 " 코르쿠트 아타의 책"을 번역하는 데 참여했다.[4] 그는 아제르바이잔 대학교 도서관 및 사비르 도서관의 소장품에서 몇몇 원고를 접하고 번역했다.[4] 그는 바쿠 교육회관에서 열린 아제르바이잔 조사 및 탐사 학회의 역사 및 민족지학 분과 회의와 바쿠에서 열린 제1차 전연방 투르크학 회의 (1926)에서 보고서를 발표했다.[4] 그가 바쿠시에 대해 수집한 정보는 그의 "이슬람 백과사전"의 "바쿠" 항목에 포함되어 있다.[4]
그는 전 세계 여러 도서관(영국, 독일, 프랑스, 터키 등), 소련(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타슈켄트, 바쿠 등)을 방문했다.[4] 그의 해외 및 소련 전역 여행의 주요 목적은 동양 필사본 컬렉션을 탐사하는 것이었다.[4] 1927년 1월 그는 니콜라이 마르의 초청으로 레닌그라드 공공 도서관의 동양 부서의 작품에 대한 컨설턴트로 과학 크레딧으로 급여를 받고, 1928년 2월 1일부터 비정규직 직원으로 등록되었다.[4]
러시아 혁명 후에도 대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 한편, 세계 각국을 방문하여 현지 조사와 강연을 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가 아니었고, 소련의 민족 정책에도 비판적이었지만, 엄밀한 사료 비판에 기반한 실증적인 문헌 사학을 통해 소비에트 동양학의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6] 1920년대 말부터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끈질긴 공격을 받았지만[6], 대숙청이 시작되기 전인 1930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했다.[6]
그의 저작 대부분은 영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었다.[1] 바르톨트의 수집된 작품은 1963년에서 1977년 사이에 9권으로 재판되었으며, 소련 편집자들이 그의 '부르주아'적 태도를 비난하는 각주를 추가했지만, 그의 명성은 텍스트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에 부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검열되지 않은 채로 남겨둘 정도였다.[1]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최근 모스크바에서 재판되었다.[1]
3. 학문적 경향 및 평가
그는 철저히 원전연구에 자신을 바쳤다. 따라서 그의 연구는 사료가 많이 남아있던 몽골 제국 시대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폭넓게 연구한 끝에 세계사에 대한 유라시아 내륙의 기여를 처음으로 지적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그전까지 미개한 정복자로 간주된 몽골 제국 등 중앙아시아사를 세계사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소련의 공식적인 역사관과 반대되는,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것으로도 보였기 때문에 그의 저서 여럿이 발간 금지 조치에 취해지기도 했었다.
그는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 제 민족사, 이슬람 역사에 관해 폭넓게 연구하여 세계사에서 내륙 아시아 지역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지적했다. 이전까지 후진적인 지역으로 여겨지던 중앙아시아를 세계사의 중추로 간주하고, 러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야만적인 정복자로 여겨졌던 몽골 제국 등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이 때문에 소련의 공식적인 역사관에 반하여 중앙아시아 제 민족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것으로 여겨져, 그의 저서가 국내에서 발간 금지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원전 사료에 의거한 엄밀한 실증주의적인 것이었으며, 학문적인 면에서 그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평생 400권 이상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했으며, 그것들은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의 《바르톨트 전집》 전 9권으로 묶여 있다. 서구에서는 '투르키스탄의 기번'이라고 불리며, 현재도 바르톨트의 거대한 연구 성과를 빼놓고는 중앙 유라시아사를 논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나가사와 카즈토시 번역으로, 소책자 《중앙 아시아 개설사》(카도카와 문고)가 출간되었다.
3. 1. 원전 연구와 실증주의
그는 철저히 원전연구에 자신을 바쳤다. 따라서 그의 연구는 사료가 많이 남아있던 몽골 제국 시대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폭넓게 연구한 끝에 세계사에 대한 유라시아 내륙의 기여를 처음으로 지적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그전까지 미개한 정복자로 간주된 몽골 제국 등 중앙아시아사를 세계사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소련의 공식적인 역사관과 반대되는,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것으로도 보였기 때문에 그의 저서 여럿이 발간 금지 조치에 취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원전 사료에 의거한 엄밀한 실증주의적인 것이었으며, 학문적인 면에서 그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평생 400권 이상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했으며, 그것들은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의 《바르톨트 전집》 전 9권으로 묶여 있다. 서구에서는 '투르키스탄의 기번'이라고 불리며, 현재도 바르톨트의 거대한 연구 성과를 빼놓고는 중앙 유라시아사를 논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3. 2. 중앙아시아사의 재조명
바실리 바르톨트는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폭넓게 연구하여 세계사에 대한 유라시아 내륙의 기여를 처음으로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미개한 정복자로 간주된 몽골 제국 등 중앙아시아사를 세계사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소련의 공식적인 역사관과 반대되는,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것으로도 보였기 때문에 그의 저서 여럿이 발간 금지 조치에 취해지기도 했었다.그의 연구는 사료가 많이 남아있던 몽골 제국 시대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원전 사료에 의거한 엄밀한 실증주의적인 연구를 하였으며, 학문적인 면에서 그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평생 400권 이상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했으며, 그것들은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의 《바르톨트 전집》 전 9권으로 묶여 있다. 서구에서는 '투르키스탄의 기번'이라고 불리며, 현재도 바르톨트의 거대한 연구 성과를 빼놓고는 중앙 유라시아사를 논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나가사와 카즈토시 번역으로, 소책자 《중앙 아시아 개설사》(카도카와 문고)가 출간되었다.
3. 3. 유라시아 관점
바실리 바르톨트는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폭넓게 연구하여 세계사에서 내륙 아시아 지역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지적했다. 그는 이전까지 후진적인 지역으로 여겨지던 중앙아시아를 세계사의 중추로 간주하고, 러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야만적인 정복자로 여겨졌던 몽골 제국 등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그는 철저히 원전연구에 자신을 바쳤다. 따라서 그의 연구는 사료가 많이 남아있던 몽골 제국 시대가 중심이 되었다. 이 때문에 소련의 공식적인 역사관에 반하여 중앙아시아 제 민족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것으로 여겨져, 그의 저서가 국내에서 발간 금지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원전 사료에 의거한 엄밀한 실증주의적인 것이었으며, 학문적인 면에서 그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평생 400권 이상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했으며, 그것들은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의 《바르톨트 전집》 전 9권으로 묶여 있다. 서구에서는 '투르키스탄의 기번'이라고 불리며, 현재도 바르톨트의 거대한 연구 성과를 빼놓고는 중앙 유라시아사를 논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3. 4. 소련 학계와의 관계
바실리 바르톨트는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폭넓게 연구하여 세계사에서 내륙 아시아 지역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지적했다. 이전까지 후진적인 지역으로 여겨지던 중앙아시아를 세계사의 중추로 간주하고, 러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야만적인 정복자로 여겨졌던 몽골 제국 등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이는 소련의 공식적인 역사관과 반대되는,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것으로도 보였기 때문에 그의 저서 여럿이 발간 금지 조치에 취해지기도 했었다.그의 연구는 철저히 원전연구에 기반을 두었으며, 특히 사료가 많이 남아있던 몽골 제국 시대가 중심이 되었다. 학문적인 면에서 그의 성과는 부정할 수 없었으며, 평생 400권 이상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했다. 그것들은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의 《바르톨트 전집》 전 9권으로 묶여 있다. 서구에서는 '투르키스탄의 기번'이라고 불리며, 현재도 바르톨트의 거대한 연구 성과를 빼놓고는 중앙 유라시아사를 논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4. 주요 저서
몽골 침략 시대의 투르키스탄/«Туркестан в эпоху монгольского нашествия»ru (상트페테르부르크: 1900)
- 몽골 침략까지의 투르키스탄/''Turkestan Down to the Mongol Invasion''영어 (런던: Luzac & Co) 1928 (번역: H. A. R. Gibb); https://archive.org/details/Barthold1928Turkestan 온라인
- 울루그베크와 그의 시대/«Улугбек и его время»ru 울루그 베크 (레이던: 1918)
- 울루그 베크와 그의 시대/"Ulug Beg und seine Zeit"de. ''동방학 연구'' 21권, 1호 (라이프치히: Brockhaus) 1935, (번역: Walther Hinz)
- 울루그-베크/"Ulug-Beg"영어. ''중앙 아시아 역사에 관한 네 개의 연구'' 2권 (레이던: E.J. Brill) 1958 (번역: V. & T. Minorsky) https://archive.org/details/barthold-1956-1962-four-studies-central-asia/page/n199/mode/2up
- https://archive.org/stream/MussulmanCulture/Mussulman%20culture#page/n3/mode/2up ''무슬림 문화'' (콜카타: 캘커타 대학교) Hasan Shaheed Suhrawardy가 러시아어에서 번역, 1934.
- 튀르크족: 중앙 아시아 튀르크 민족의 역사에 관한 12개의 강의/«12 лекций по истории турецких народов Средней Азии»ru 튀르크족: 중앙 아시아 튀르크 민족의 역사에 관한 12개의 강의
- 중앙 아시아 튀르크족의 역사에 관한 12개의 강의/''12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Türken Mittelasiens''de (다름슈타트: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32/35 및 1962)
- 투르키스탄 단편사/"A Short History of Turkestan"영어 (1956). ''중앙 아시아 역사에 관한 네 개의 연구'' 1권 (레이던: E.J. Brill) 1956 (번역: V. & T. Minorsky)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57651/page/n7/mode/2up
- 이란의 역사 지리학/''An Historical Geography of Iran''영어 (프린스턴: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 1984 (번역: Svat Soucek; 편집: C.E. Bosworth)
- 전집/''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ru (모스크바: 동방 문학 출판사) 1963-77 9권 — 전집
- 과학적 목적을 위한 중앙 아시아 여행 보고서/''Отчет о поездке в Среднюю Азию с научною целью''ru (상트페테르부르크: 임페리얼 과학 아카데미 인쇄소) 1897
- 투르키스탄 문화 생활사/''История культурной жизни Туркестана''ru (모스크바: 소련 과학 아카데미 출판) 1927
- 역사 지리학에 관한 연구/''Работы по исторической географии''ru (모스크바: 출판사 «동방 문학»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2002
- 『세미레치예사』(1898년)
- 『몽골 침공 시대의 투르키스탄』(1900년)
- 『유럽과 러시아의 동양 연구사』(1911년)
- 『울루그 베그와 그 시대』(1918년)
- 『투르키스탄사』(1922년)
- 『투르키스탄 문화사』(1927년) - ※코마츠 히사오 감수, 헤이본샤 동양문고: 전 2권으로 간행(2011년 2・3월)
- 『미르 알리시르와 정치』(1928년)
4. 1. 영어
바실리 바르톨트는 다양한 언어로 중앙아시아와 이란의 역사 및 문화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영어로 번역된 주요 저서로는 ''Turkestan Down to the Mongol Invasion'' (London: Luzac & Co, 1928) (Trans. T. Minorsky & C.E. Bosworth), ''A Short History of Turkestan'' (1920) in Four Studies on the History of Central Asia (Leiden: E.J. Brill, 1956) (Trans. V. & T.Minorsky), 그리고 ''An Historical Geography of Ira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translated by Svat Soucek; edited by C.E. Bosworth) 등이 있다. 그는 또한 울루그 베그에 대한 연구를 영어로 출판하였는데, ''"울루그-베크". 중앙 아시아 역사에 관한 네 개의 연구'' 2권 (레이던: E.J. Brill, 1958) (번역: V. & T. Minorsky)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무슬림 문화'' (콜카타: 캘커타 대학교)는 Hasan Shaheed Suhrawardy에 의해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1934년에 출판되었다.4. 2. 러시아어
바실리 바르톨트는 다양한 러시아어 저서를 남겼다. 1897년에는 《과학적 목적을 위한 중앙 아시아 여행 보고서》를 출간했다. 1900년에는 《몽골 침공 시대의 투르키스탄》을 출간했다. 1918년에는 《울루그 베그와 그 시대》를 출간했다. 1927년에는 《투르키스탄 문화 생활사》를 출간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는 총 9권으로 구성된 《전집》이 모스크바에서 출판되었다. 2002년에는 《역사 지리학에 관한 연구》가 모스크바에서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1898년에는 『세미레치예사』, 1911년에는 『유럽과 러시아의 동양 연구사』, 1922년에는 『투르키스탄사』, 1928년에는 『미르 알리시르와 정치』를 저술했다. 『투르키스탄 문화사』는 코마츠 히사오의 감수를 거쳐 헤이본샤 동양문고에서 전 2권으로 간행되었다.4. 3. 한국어 번역
바실리 바르톨트의 저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한국어로도 번역된 자료가 있다. 다음은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 목록이다.- 『투르키스탄 문화사』 (코마츠 히사오 감수, 헤이본샤 동양문고: 전 2권, 2011년 2・3월 간행)
5. 연보
186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88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1891년 졸업한 뒤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 1893년 세미레체 지역을 현지 조사하였고,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비상근 강사가 되었다. 1900년 학사 학위 논문으로 『몽골 침입 시대의 투르키스탄』을 썼고,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객원 교수가 되었다. 1904년 사마르칸트 발굴에 참가하였으며,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정교수가 되었다. 1913년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917년 러시아 국경지대 인구의 부족 구성학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928년 『몽골 침입 이전의 투르키스탄』가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1930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하였다.
참조
[1]
백과사전
2021-05-09
[2]
서적
Выдающийся русский востоковед В. В. Бартольд: научно-биографический очерк
АНТ ССР
[3]
서적
Коран как объект изучения
LAP LAMBERT Academic Publishing
[4]
웹사이트
Бартольд Васил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 академик-востоковед
https://webcitation.[...]
2023-11-30
[5]
서적
Классик мировой ориенталистики // Российские подвижники в истории культуры Кыргызстана
[6]
웹사이트
山内昌之による「トルキスタン文化史」翻訳書評
https://web.archive.[...]
2011-05-02 # 추정 날짜. 원본 링크가 없어서 웹아카이브 날짜를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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